Rechtsschutzversicherung
독일에 처음 정착했을 때 내가 가입한 보험 중 하나는 변호사 보험(Rechtsschutzversicherung)이었다.
독일에서는 노동 분쟁이나 교통사고, 계약 분쟁 등에 대비해 변호사 비용을 보장하는 Rechtsschutzversicherung에 가입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생활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보험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아니며, 계약에 따라 일정 금액의 자기부담금(Selbstbeteiligung)은 직접 부담해야 한다.
10월, 경고장 두 장과 퇴사합의서를 동시에 받은 날 나는 처음으로 노동법 전문 변호사를 찾아갔다.
예상과 다른 해고 사유
변호사는 경고장 두 장과 퇴사합의서가 같은 날 전달된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경고장 내용을 간단히 확인한 뒤, 내용 자체도 다툴 여지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경고장 두 장과 퇴사합의서가 동시에 전달된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후 해고가 이루어진다면 부당해고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몇 달 뒤 나는 실제로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다시 같은 변호사를 찾아갔다.
나는 당연히 낮은 성과(Low Performance)를 이유로 한 해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받았던 경고장 역시 같은 이유였고, 퇴사합의서 역시 같은 시기에 제시되었으며, 그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하루에 여러 차례 보고 미팅에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사의 생각은 달랐다.
변호사는 회사가 해고 사유를 변경했을 수도 있으니, 우선 회사가 어떤 이유를 주장하는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실제로 회사가 제시한 해고 사유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회사는 경영상 이유(Betriebsbedingte Kündigung) 에 따른 해고라고 설명했다.
이는 직원의 잘못이 아니라 회사의 경영상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해고를 의미한다.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몇 달 동안 회사가 문제 삼았던 것은 경영상 이유가 아니라 낮은 성과였다.
경고장도 그 이유였고, 퇴사합의서 역시 같은 시기에 제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낮은 성과를 이유로 한 해고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처음 변호사를 찾아갔을 때도 경고장 두 장과 퇴사합의서가 같은 날 전달된 점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해고가 이루어질 경우 부당해고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오히려 회사 역시 낮은 성과만을 근거로 해고를 진행하는 데에는 부담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송을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해고 통지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대응 방법이었다.
독일에서는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해고 통지 후 3주로 제한되어 있다.
이 기간을 넘기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고의 효력을 다투기 매우 어려워진다.
나는 변호사와 몇 차례 상담을 진행한 뒤 결국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상담 과정에서 들은 이야기는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회사에서는 여러 직원들이 퇴사합의서를 받고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원 감축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나는 사회적 선택(Sozialauswahl) 측면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경영상 해고를 할 경우 근속기간, 나이, 부양가족, 장애 여부 등 사회적 요소를 함께 고려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비교적 최근에 입사한 직원이었고, 결혼하지 않았으며, 부양해야 할 자녀도 없었고, 임신이나 장애와 같이 특별한 보호 사유 역시 없었다.
독일 노동법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경영상 해고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으며, 변호사는 바로 그 점이 회사 측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소송이 시작된 뒤 회사 측은 합의(Vergleich)를 제안해 왔다.
독일의 노동소송에서는 판결까지 가기보다 중간에 합의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퇴사합의서를 거절한 뒤 실제 해고가 이루어졌을 때는 별도의 합의금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소송이 시작되자 회사는 다시 합의를 제안했다.
다만 제안된 금액은 처음 퇴사합의서에서 제시했던 조건보다 아주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이미 지불된 변호사 비용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큰 차이는 없었다.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CEO와도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CEO는 여러 차례 사회적 선택 문제를 언급하며 소송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 합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내 변호사 역시 현실적으로는 합의를 고려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소송에는 시간도 돈도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다.
결과 역시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미 다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결국 경영상 이유로 해고할 예정이었다면,
왜 몇 달 동안 낮은 성과 문제에 대한 지적이 반복되었던 것일까.
왜 반복적인 경고장과 퇴사합의서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 다른 직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관리했던 것일까.
왜 영주권 신청에 필요했던 Arbeitgeberbescheinigung을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3개월이 넘도록 받을 수 없었던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가보고 싶었다.
설령 소송에서 패소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합의 대신 소송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조정기일(Gütetermin)이 다가왔다.
Gütetermin은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법원이 당사자 간 합의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는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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