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적었듯이, 나는 결국 퇴사합의서에 서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영주권 신청까지 두 달 남짓 남은 시점에서 회사를 떠나는 것은 나에게 너무 큰 위험이었다.
당시 나는 블루카드(Blue Card)를 소지하고 있었다. 내가 외국인청으로부터 받은 안내에 따르면 고용이 종료될 경우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은 약 3개월 정도였다. 또한 고용 종료 사실을 2주 이내에 외국인청에 신고하지 않을 경우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내용 역시 안내받은 상태였다.

독일 취업 시장은 이미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나는 짧은 기간 안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나는 퇴사합의서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반복되는 퇴사관련 미팅
회사는 처음에 퇴사합의서에 대해 2주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CEO는 2~3일마다 퇴사와 관련된 미팅을 반복적으로 잡기 시작했다.
미팅이 열릴 때마다 퇴사합의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고,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앞으로 나를 "집중 관리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 이후 업무 방식도 달라졌다.
이미 회사에서는 타임로그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고, 나는 업무 시간을 분 단위로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 2~5회 정도 진행 상황 보고 미팅에 참석해야 했다.
하루 평균 3~5번의 보고미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미팅 일정을 바탕으로 별도의 캘린더를 정리해 보았다.
나는 4일 동안 총 약 15회의 보고 또는 관련 미팅이 잡혀 있었다.
- 월 : 팀장 미팅 3회 (09:15, 15:14, 15:17)
- 화 : CEO 미팅 1회 (16:50), 팀장 미팅 2회 (09:15, 15:00)
- 수 : 팀장 미팅 4회 (10:30, 10:34, 13:00, 15:30)
- 목 : 팀장 미팅 4회 (09:15, 09:37, 11:45, 13:30), 추가 미팅 1회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3~5회의 미팅이 반복적으로 진행되었다.

많을 때는 한두 시간 간격으로 업무 결과를 설명해야 했고, 어느 순간부터 업무에 집중하기보다 다음 보고를 준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도 잦아졌다.
업무보다 보고를 준비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정기적으로 잡혀 있는 보고 미팅 외에도 예고 없이 전화가 걸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전화를 받으면 현재 진행 중인 업무를 설명해야 했고, 갑작스럽게 화면 공유를 요청받는 일도 잦아졌다.
타임로그에 기록한 시간에 대한 질문도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왜 특정 작업에 이 정도 시간이 걸렸는지, 왜 예상보다 오래 걸렸는지, 왜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도 적지 않았다.
패스워드 만료로 인해 새로운 계정을 발급받는 데 걸린 시간, 회사 인터넷이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았던 시간,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회사 방화벽 문제로 Git 인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간, 다른 개발자가 구현해야 할 기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시간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역시 결과적으로는 내 업무 지연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은 업무 일정이었다.
몇 시간 안에 완료하기 어려워 보이는 작업에도 2~3시간 정도의 짧은 데드라인이 주어졌고, 이후 결과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당시 나는 업무 자체보다 업무를 설명하고 보고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점점 달라지기 시작한 것들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도 이전과 다른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자신의 브레이크 타임을 이용해 은행 업무를 보거나 관공서를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청이나 은행 방문이 필요한 경우에도 연차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Arbeitgeberbescheinigung(고용주가 현재 재직 사실과 근무 조건 등을 확인해 주는 서류) 역시 여러 차례 요청했다.
당시 나는 한 달 이내에 발급된 최신 서류가 필요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몇 달 전에 발급된 서류가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서류는 제공되지 않았다.
퇴근 후 개인 비용으로 다니고 있던 독일어 학원에 대해서도 중단하고 영어 공부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존에는 초과 근무가 발생하면 그 시간만큼 일찍 퇴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이전까지는 문제로 지적되지 않았던 일들 역시 갑자기 문제 삼아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병가를 사용하며 의사의 진단서(Krankschreibung)를 첨부해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메일 본문에 "진단서 첨부"라는 문구를 별도로 적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진단서는 이미 첨부되어 있었고, 이전까지는 해당 문구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지 않았고 여러 직원이 포함된 메일을 통해 공유되었다.
나는 그 메일을 읽으며 당황했다.
만약 새로운 규칙이나 절차가 필요했다면 나에게 직접 설명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관리가 엄격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런 변화들이 나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출근 자체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했고, 보고 미팅 시간이 다가오면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도 긴장하게 되었고, 업무용 메신저 알림이 뜰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 몸이 이미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몇 주 뒤, 회사 화장실에서 갑자기 귀에서 강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시야가 흐려졌고,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날 이후 남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찾게 되었고, 의사로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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